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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투어가이드] 후암동 건축물, 100년 역사를 걷다

작성자 성현

등록일2024.11.22

조회수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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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은 서울에서 조금 독특한 매력을 지닌 동네입니다. 100년의 시간이 담긴 건축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어, 이곳을 거닐면 자연스럽게 한국 근현대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첫번째 가이드는 후암동을 중심으로 한 특별한 도보 코스를 소개합니다. 이름하여 "후암동 건축물을 통해 본 한국의 100년 변화"입니다. 건축물에 얽힌 이야기를 따라 시간 여행을 떠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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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숙대입구 2번 출구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건축물이란 무엇일까요? 단순히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라고 정의하기엔, 건축물은 그 자체로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입니다. 후암동을 걷는 동안 우리는 건축물에 깃든 이야기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100년 변화를 살펴봅니다. 숙대입구에서 출발해 후암동을 지나 남산 도서관까지 이어지는 약 3.2km의 여정입니다. 이제 출발해 볼까요?


후암동: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거리

갈월동에서 후암동으로 들어서면 골목마다 다정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개인 카페, 빵집, 서재, 공유 주방 등 현대적인 공간과 함께 오래된 주택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일본인 고위 관리들의 고급 주택지로 개발된 곳이었습니다. 당시 후암동은 일본인들이 선호하던 언덕 위의 주거지와 닮은 지형 덕분에 선택되었다고 합니다.


1. 적산가옥: 적의 재산에서 우리의 문화로

후암동 골목을 걷다 보면 1920년대에 지어진 일본식 가옥, 적산가옥이 눈에 들어옵니다. ‘적산’은 적의 재산이라는 뜻으로, 광복 후 일본인들이 남긴 건축물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후암동의 적산가옥은 일본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문화주택’ 형태로, 빨간 지붕과 굴뚝, 테라스 등 서양식 주택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도 서양식 건축이 유행했고, 이를 반영한 문화주택은 일본인 관료와 부호들에게 인기 있는 주거 형태였습니다. 특히 후암동은 300채 이상의 문화주택이 현존해, 한국에서 적산가옥 밀집지로 손꼽힙니다. 이 건축물들은 단순히 일본식 주택 그 이상으로, 당시의 도시계획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산입니다.


2. 삼광초등학교: 일본인 가족의 흔적

다음 목적지는 삼광초등학교입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로 설립된 이곳은 일본인 가족 단위 이주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당시 후암동 인구의 약 80%가 일본인이었으며, 이들의 생활 수준은 계층에 따라 달랐습니다. 언덕 위에는 부유한 가족들이, 아래쪽에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 주로 거주했습니다.


3. 스페이스 후암23: 옛 철도청의 새로운 변신

스페이스 후암23은 일제강점기 철도청 관련 건물을 리모델링한 복합문화공간입니다. 6.25 전쟁으로 후암동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전쟁 이후 복구 작업으로 당시의 건축 양식이 유지되었습니다. 후암동을 걸으며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공간을 느껴보세요.


4. 한국은행 직원 공동숙소: 경제의 중심에서

후암동 244번지에는 한때 조선은행 사택지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의 직원들이 거주했던 공간으로, 당시 금융기관의 위상을 보여줍니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대체되었지만, 과거의 흔적을 떠올리며 걸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5. 지월장: 일본식 정원의 흔적

후암동의 대표적인 적산가옥 중 하나인 지월장은 현재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곳은 일본인 상무이사의 사택이었으며, 일본식 정원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지형을 따라 계단식으로 조성된 정원과 연못은 당시 일본식 주택의 고급스러움을 엿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6. 영락보린원: 유년 시절의 역사

다음으로 들를 곳은 영락보린원입니다. 이곳에는 얽힌 이야기가 많은데요. 그 중 일제강점기 때 소다 가이치(1867~1962)가 세운 근대 고아원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해방 후에도 가이치 목사 부부는 한국인의 존경을 받으며 고아원을 계속 운영했습니다. 그러다 한경직 목사가 신의주에서 월남하여 서울 영락교회를 세운 후 이 고아원을 인수했습니다. ‘한국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소다 가이치는 1913년 서울에 가마쿠라 보육원을 창설하고, 1919독립운동 시기에는 구속된 청년들의 구호에 나섰습니다. 그가 한국에 오게 된 것은 1899년 어느날 대만에서 술에 취해 길을 가다가 넘어져 거의 죽어가고 있을때 우연히 만난 한 한국인 때문이었습니다. 그 한국인이 소다 가이치를 불쌍하게 여겨 여관으로 업고 데려가 치료해주고 밥값을 내줬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얻게 된 인생을 보람있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은인의 나라에서 봉사하겠다는 생각으로 1905년 한국에 건너오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친절 때문에 탄생한 고아원은 해방 이후에도 보육 시설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1950년대 전쟁 고아를 돌보는 역할을 하며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희망을 모두 품고 있는 장소입니다.  


7. 후암동 도닥다리와 기생충

이제 해방 이후 해방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해방촌은 부촌으로 유명했던 곳이었지만 동부이촌동 개발과 강남 개발이 무르익으면서 아파트 중심의 새로운 부유층 주거지가 자리잡으며 후암동 주민의 이탈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후암동은 고급주거지로서의 이미지가 점차 탈색되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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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기생충 보셨을까요? 부잣집에서 기우네 집으로 내려가는 수많은 계단을 기억하십니까? 영화의 하이라이트 비오는 날, 그 장면은 여러개 장소를 조합해서 만들었습니다. 성북동 언덕길, 자하문 터널, 그 다음이 바로 도닥다리, 창신동, 북아현동의 조합인데요. 그 중 도닥다리는 사진에 보이시는 것과 같이 기우, 기정이 무수히 많은 다리 밑을 내려오고, 잠시 비를 피하며 말다툼을 하던 곳입니다. 


후암동은 80년대 이후 개발이 멈추고 노후되면서 슬럼화가 진행됐습니다. 이에 따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이 마련되었습니다. 먼저, 후암동에는 협소주택이나 미니빌딩 등 옛 도심의 길과 지형을 바꾸지 않고 작은 필지 안에서 리모델링하여 공간을 만드는 건물을 짓도록 장려하는 정책이 도입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슬럼화를 방지하고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8. 콤포트서울 

마지막으로 살펴볼 건축물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은 콤포트 서울입니다. 콤포트 서울은 23년 한국건축문화대상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복합문화공간인데요. 경계없는 작업실 건축사 사무소 지었고, 이 건물은 두 길을 연결하는 계단을 만들어 보행자들이 소월로에서 두텁바위로 60길 양쪽으로 오다닐 수 있게 했습니다. 


이 건물이 들어서기 전까지 두 길을 오갈 수 있는 방법은 소월로 20길 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도시 계획으로 적당한 위치에 공공보행통로를 지정하는데 이 일대는 지구단위계획이 없었던 것이죠. 개인 소유의 땅을 자발적으로 오픈하여 동네 주민들이 오다닐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저는 이 건물을 보며 요즘 사람들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단어는 ‘공유’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건물에 모두를 위한 길을 내고, 후암동에는 ‘공유주방’,’공유서재’등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개인에서 나아가 같이 사는 사람을 생각하는 예쁜 마음이 전해져는 건축물이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이제 소월길이 나옵니다. 소월길은 진달래꽃 시인 김정식의 호를 따라 1984년 제정한 길 이름입니다. 1968년에 한국일보사가 남산도서관 옆에 소월비를 세운 데서 따왔다고 합니다.


9. 남산도서관 맞은편 두텁바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후암동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저와 함께 보셨듯이 후암동에는 아주 오래되고 낡은 집, 고급 빌라, 새로 지은 단독 주택 등 다양한 형태의 주택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이곳에 전성서가 있었고, 본토박이들은 주로 고기를 파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적산가옥을 불하받아 고급 문화 주택에 거주한 사람들과 월남한 이북 피난민들이 수십 년간 함께 공존하며 살았습니다. 최근에는 ‘협소주택’이란 타이틀로 가장자리 땅에 재치 있게 자리잡은 새로운 주거 형태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후암동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들과 좁은 골목길로 이루어진 공간이 아닙니다. 이곳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얽히고 설킨 살아있는 역사서입니다. 앞으로도 이곳의 소중한 가치를 계속해서 지켜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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